2009년 03월 25일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

사연이 많은 책이다. 무엇보다 폐기시킨 2,000권의 책을 만들어주느라 제 몸을 희생했던 나무들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저자인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미안하다. 독일 원저작권사에서는 2차대전 희생국인 대한민국에서 이 책이 아직도 나오지 않은 걸 의아해했다. 그래서 저작권계약도 아주 싸게 해주었다. 그런데 신문기사를 통해 호평을 받은 즉시 책을 회수해버려 지금까지도 판매가 잘 되지 않는다. 작은 출판사에서 다른 홍보 수단을 동원하지 못해 많은 독자들이 책이 나왔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역사학 쪽에서는 최근 들어 '기억'이 화두라고 한다. 객관적인 시각이 들어 있는 기록이나 자료, 문헌학적 정보가 아니라 개개인이 간직하고 있는(개인의 입장과 개별적 상황이 녹아 있는) 현실 그대로의 역사, 경험의 역사가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을 제국 내부에서 경험한 사람의 유일한 기록이다. 그치만, 이 책의 가장 주목할 만한 미덕은 다른 무엇보다 "재밌다는 것"이다!
유일한 내부 증언
제2차 세계대전은 현대사의 블랙홀이다. 지난 세기의 모든 문제는 20세기를 양분한 이 소용돌이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홀로코스트와 엮이기 시작하면, 엉키고 꼬인 실타래를 찾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때문에 이런 복잡한 사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연대기 역시,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미국으로 망명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저술에서부터 아렌트와 최근의 여러 성과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완전한 파멸을 맞이할 때까지 끝나지 않은 이 전쟁은 당사자들에게(가해자들에게조차) 기억을 정리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치제국에 관한 지식이 쌓여가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 이유도 살아 있는 육성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괴테가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가 직접 건네는 증언이 악마와 그 주변을 더 생생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의 건축가
『기억』의 저자 알베르트 슈페어는 제3제국의 핵심 세력 가운데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이다. 히틀러는 제외하고라도 괴링, 괴벨스, 히믈러, 칼텐브루너처럼 정신분석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무리 가운데 슈페어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물이었고 얼마 되지 않은 지식인(괴벨스를 제외하면 거의 유일한)이었다. 슈페어는 만하임의 전형적인 중산층 부르주아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 건축가가 되길 희망한 슈페어는 뮌헨과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다. 당시 독일 건축계를 주도하던 건축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테세노의 조교를 하던 와중에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나치당에 가입한다. 당시의 많은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뚜렷한 정치적 신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히틀러의 개인적 매력에 매료되어 나치당원이 되었던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나치당 청사 공사에 참여하게 된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의 장식과 시각적 장치를 맡아 유례없는 성공을 거둠으로써 ‘히틀러의 건축가’로 자리매김한다(156-157쪽 화보참조). 히틀러와 괴벨스의 대중선동을 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장치를 만든 이가 바로 슈페어였다. 서른 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가 히틀러와 함께 독일제국의 건축과 도시계획을 관장하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군수장관 슈페어
예술가의 꿈을 좌절당했던 히틀러는 파리를 함락시킨 후, 파리로 예술기행을 떠난다. 물론 슈페어도 함께 동행했고, 슈페어와 히틀러는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과대망상적인 건축계획의 꿈을 불태운다. 군수장관이었던 토트 박사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히틀러는 37세의 슈페어를 독일군 전체의 군수물자를 책임지는 군수장관의 자리에 앉힌다. 제3제국 최연소 장관이었다. 군사적인 업무엔 완전한 문외한이었음에도 슈페어는 탁월한 업무능력을 발휘했고,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던 군부의 반란주동자들조차 슈페어는 계속해서 군수장관직에 있어야 한다고 여길 정도로 군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군수와 전시 경제를 장악한 슈페어는 “예술가 정치인”을 선호한 히틀러의 2인자로 불렸다. 점령지의 강제수용소의 노동력을 군수생산에 동원하면서 수감자들의 인권을 짓밟았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패배한 독일에는 폐허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 히틀러에 맞서 독일의 문화유산과 산업시설을 보호하려고 노력한 인물도 슈페어였다. 괴벨스, 히틀러와 달리 자살할 마음이 없었던 슈페어는 종전과 함께 연합군에 체포된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최고의 피고
체포된 슈페어는 다른 1급 전범들과 함께 뉘른베르크 국제 전범재판의 법정에 선다. 변명으로 일관하고 히틀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다른 피고인들과 달리, 슈페어는 제3제국의 지도부가 공동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 자기반성과 자기변호를 절묘하게 뒤섞은 슈페어의 태도는 검사와 판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피고 유형이었고, 심지어는 ‘선량한 나치’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군수장관으로서 슈페어는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을 군수생산에 동원한 최종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강제수용소 노동력 동원의 실무 책임자 자우켈이 교수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슈페어는 20년형을 언도받는다. 이로써 슈페어는 제3제국의 각료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내부자의 시선으로
슈페어는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엄청난 메모광이었기에 『기억』을 저술할 수 있었다. 군수장관으로서 작성한 업무일지, 편지, 전보 등을 바탕으로 내부자가 아니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내용들을 슈페어는 비할 데 없이 생생하게 묘사한다. 예컨대 반유대주의로만 이해되는 히틀러의 인종주의는 체계적인 사고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조야한 편견의 산물이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연거푸 금메달을 목에 건 제시 오언스를 두고 정글 출신의 흑인은 미개하지만 체력은 문명화된 백인보다 강하기 때문에 흑인과 시합을 벌이는 건 공정하지 못하며(128쪽), 러시아인의 체격이 우수한 걸 이유삼아 독일군이 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고 자조하는 히틀러의 우스꽝스런 인종주의의 실체를 만나볼 수 있다. 한편 핵물리학을 유대인의 학문으로 치부한 히틀러의 편견은 오히려 다행으로 보이기도 한다.
전 세계의 밀리터리 마니아들에 의해 낭만화되고 부풀려지기 일쑤인 독일군의 무기와 V2로켓을 비롯한 페네뮌데의 비밀무기가 얼마나 실패였는지도 이 모두를 담당했던 군수장관의 입으로 확인할 수 있다(385쪽).
“히틀러에 관한 가장 내밀한 묘사”라는 『뉴욕타임스』의 평가대로 『기억』은 매쪽마다 실제 경험한 에피소드와 사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건강에 대한 히틀러의 불안과 사이비 의사에 대한 맹신, 식생활과 개와 같은 히틀러의 개인적인 측면, 모든 것이 체계적으로 움직일 것처럼 보이는 나치 제국이 실상은 관료주의의 병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등(900쪽). 그리고 무엇보다 제3제국의 두 건축가, 히틀러와 슈페어가 꿈꾼 베를린 도시계획의 과대망상적인 규모와 배치는 제3제국이 얼마나 헛된 망상 위에서 가까스로 지탱되고 있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전선이 붕괴되는 시점에서도 히틀러는 미래에 세울 천년왕국의 단꿈에 빠져 있다(10장 외).
그러나 한편으로는 파멸이 눈앞에 닥치고 히틀러의 후광이 사라졌을 때조차, 심지어 명령에 불복종하며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마음먹을 때조차, 히틀러에게서 완전히 돌아서지 못했던 슈페어의 모습은 독일 전체를 감싸고 있던 광기와 미망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759쪽).
자기반성과 자기변호 사이에서
저자 슈페어는 “나는 단지 과거를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경고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슈페어는 책 전반을 통해 지식인으로서 비판적으로 사유할 책무를 잊었던 치명적인 과오에 대해 통절한 반성을 드러낸다. 어렸을 때부터 기계에 탐닉했으며, 모든 군수물자의 생산을 관장하는 군수장관이었던 저자가 제기하는 기술문명에 대한 경고 또한 강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한나 아렌트가 탁월하게 분석했듯이 아이히만은 명령의 연쇄 고리 속에서 ‘생각 없이’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말하는 슈페어는 제국장관으로서 모든 명령과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었다. 슈페어도 단지 히틀러의 명령을 따른 자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래서 아이히만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을까? 결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모든 책임을 히틀러에게 떠넘기는 동료들을 “수백만 마르크를 받는 우편배달부”라고 비난했던 유일한 인물 역시 슈페어였기 때문이다(869쪽). 철학박사였지만 오랜 당원으로 히틀러와 비판적 거리를 설정할 수 없었던 괴벨스와 달리, 슈페어는 사유할 능력이 있던 유일한 각료였다. 그렇기 때문에 즐겁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사고를 회피해 균형감각을 잃었고, 매달 내는 당회비로 정치적 의무감을 청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모든 악의 고양을 낳았다고 말하는 슈페어의 자기반성은 뼈에 사무칠 만큼 절실하게 들린다(46쪽). 그러나 홀로코스트를 비롯해 제국이 저지른 모든 악을 모를 리 없었고,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기에 슈페어의 죄는 아이히만보다 훨씬 더 중할지도 모른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슈페어의 자기반성이 자기변호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까닭 역시 슈페어가 사유할 줄 모르는 한갓 관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반성과 자기변호의 줄타기는 슈페어에게 목숨을 부지할 기회를 주었고, 우리에겐 제3제국의 속살을 살펴볼 기회를 주었다. 이제 슈페어가 군수장관으로서 보낸 4년의 시간이 20년의 형기와 이 책 『기억』으로 상쇄될 수 있는지는 독자의 몫이리라.
제2차 세계대전은 현대사의 블랙홀이다. 지난 세기의 모든 문제는 20세기를 양분한 이 소용돌이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홀로코스트와 엮이기 시작하면, 엉키고 꼬인 실타래를 찾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때문에 이런 복잡한 사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연대기 역시,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미국으로 망명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저술에서부터 아렌트와 최근의 여러 성과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완전한 파멸을 맞이할 때까지 끝나지 않은 이 전쟁은 당사자들에게(가해자들에게조차) 기억을 정리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치제국에 관한 지식이 쌓여가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 이유도 살아 있는 육성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괴테가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가 직접 건네는 증언이 악마와 그 주변을 더 생생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의 건축가
『기억』의 저자 알베르트 슈페어는 제3제국의 핵심 세력 가운데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이다. 히틀러는 제외하고라도 괴링, 괴벨스, 히믈러, 칼텐브루너처럼 정신분석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무리 가운데 슈페어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물이었고 얼마 되지 않은 지식인(괴벨스를 제외하면 거의 유일한)이었다. 슈페어는 만하임의 전형적인 중산층 부르주아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 건축가가 되길 희망한 슈페어는 뮌헨과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다. 당시 독일 건축계를 주도하던 건축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테세노의 조교를 하던 와중에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나치당에 가입한다. 당시의 많은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뚜렷한 정치적 신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히틀러의 개인적 매력에 매료되어 나치당원이 되었던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나치당 청사 공사에 참여하게 된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의 장식과 시각적 장치를 맡아 유례없는 성공을 거둠으로써 ‘히틀러의 건축가’로 자리매김한다(156-157쪽 화보참조). 히틀러와 괴벨스의 대중선동을 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장치를 만든 이가 바로 슈페어였다. 서른 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가 히틀러와 함께 독일제국의 건축과 도시계획을 관장하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군수장관 슈페어
예술가의 꿈을 좌절당했던 히틀러는 파리를 함락시킨 후, 파리로 예술기행을 떠난다. 물론 슈페어도 함께 동행했고, 슈페어와 히틀러는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과대망상적인 건축계획의 꿈을 불태운다. 군수장관이었던 토트 박사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히틀러는 37세의 슈페어를 독일군 전체의 군수물자를 책임지는 군수장관의 자리에 앉힌다. 제3제국 최연소 장관이었다. 군사적인 업무엔 완전한 문외한이었음에도 슈페어는 탁월한 업무능력을 발휘했고,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던 군부의 반란주동자들조차 슈페어는 계속해서 군수장관직에 있어야 한다고 여길 정도로 군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군수와 전시 경제를 장악한 슈페어는 “예술가 정치인”을 선호한 히틀러의 2인자로 불렸다. 점령지의 강제수용소의 노동력을 군수생산에 동원하면서 수감자들의 인권을 짓밟았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패배한 독일에는 폐허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 히틀러에 맞서 독일의 문화유산과 산업시설을 보호하려고 노력한 인물도 슈페어였다. 괴벨스, 히틀러와 달리 자살할 마음이 없었던 슈페어는 종전과 함께 연합군에 체포된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최고의 피고
체포된 슈페어는 다른 1급 전범들과 함께 뉘른베르크 국제 전범재판의 법정에 선다. 변명으로 일관하고 히틀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다른 피고인들과 달리, 슈페어는 제3제국의 지도부가 공동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 자기반성과 자기변호를 절묘하게 뒤섞은 슈페어의 태도는 검사와 판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피고 유형이었고, 심지어는 ‘선량한 나치’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군수장관으로서 슈페어는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을 군수생산에 동원한 최종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강제수용소 노동력 동원의 실무 책임자 자우켈이 교수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슈페어는 20년형을 언도받는다. 이로써 슈페어는 제3제국의 각료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내부자의 시선으로
슈페어는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엄청난 메모광이었기에 『기억』을 저술할 수 있었다. 군수장관으로서 작성한 업무일지, 편지, 전보 등을 바탕으로 내부자가 아니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내용들을 슈페어는 비할 데 없이 생생하게 묘사한다. 예컨대 반유대주의로만 이해되는 히틀러의 인종주의는 체계적인 사고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조야한 편견의 산물이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연거푸 금메달을 목에 건 제시 오언스를 두고 정글 출신의 흑인은 미개하지만 체력은 문명화된 백인보다 강하기 때문에 흑인과 시합을 벌이는 건 공정하지 못하며(128쪽), 러시아인의 체격이 우수한 걸 이유삼아 독일군이 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고 자조하는 히틀러의 우스꽝스런 인종주의의 실체를 만나볼 수 있다. 한편 핵물리학을 유대인의 학문으로 치부한 히틀러의 편견은 오히려 다행으로 보이기도 한다.
전 세계의 밀리터리 마니아들에 의해 낭만화되고 부풀려지기 일쑤인 독일군의 무기와 V2로켓을 비롯한 페네뮌데의 비밀무기가 얼마나 실패였는지도 이 모두를 담당했던 군수장관의 입으로 확인할 수 있다(385쪽).
“히틀러에 관한 가장 내밀한 묘사”라는 『뉴욕타임스』의 평가대로 『기억』은 매쪽마다 실제 경험한 에피소드와 사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건강에 대한 히틀러의 불안과 사이비 의사에 대한 맹신, 식생활과 개와 같은 히틀러의 개인적인 측면, 모든 것이 체계적으로 움직일 것처럼 보이는 나치 제국이 실상은 관료주의의 병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등(900쪽). 그리고 무엇보다 제3제국의 두 건축가, 히틀러와 슈페어가 꿈꾼 베를린 도시계획의 과대망상적인 규모와 배치는 제3제국이 얼마나 헛된 망상 위에서 가까스로 지탱되고 있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전선이 붕괴되는 시점에서도 히틀러는 미래에 세울 천년왕국의 단꿈에 빠져 있다(10장 외).
그러나 한편으로는 파멸이 눈앞에 닥치고 히틀러의 후광이 사라졌을 때조차, 심지어 명령에 불복종하며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마음먹을 때조차, 히틀러에게서 완전히 돌아서지 못했던 슈페어의 모습은 독일 전체를 감싸고 있던 광기와 미망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759쪽).
자기반성과 자기변호 사이에서
저자 슈페어는 “나는 단지 과거를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경고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슈페어는 책 전반을 통해 지식인으로서 비판적으로 사유할 책무를 잊었던 치명적인 과오에 대해 통절한 반성을 드러낸다. 어렸을 때부터 기계에 탐닉했으며, 모든 군수물자의 생산을 관장하는 군수장관이었던 저자가 제기하는 기술문명에 대한 경고 또한 강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한나 아렌트가 탁월하게 분석했듯이 아이히만은 명령의 연쇄 고리 속에서 ‘생각 없이’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말하는 슈페어는 제국장관으로서 모든 명령과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었다. 슈페어도 단지 히틀러의 명령을 따른 자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래서 아이히만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을까? 결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모든 책임을 히틀러에게 떠넘기는 동료들을 “수백만 마르크를 받는 우편배달부”라고 비난했던 유일한 인물 역시 슈페어였기 때문이다(869쪽). 철학박사였지만 오랜 당원으로 히틀러와 비판적 거리를 설정할 수 없었던 괴벨스와 달리, 슈페어는 사유할 능력이 있던 유일한 각료였다. 그렇기 때문에 즐겁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사고를 회피해 균형감각을 잃었고, 매달 내는 당회비로 정치적 의무감을 청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모든 악의 고양을 낳았다고 말하는 슈페어의 자기반성은 뼈에 사무칠 만큼 절실하게 들린다(46쪽). 그러나 홀로코스트를 비롯해 제국이 저지른 모든 악을 모를 리 없었고,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기에 슈페어의 죄는 아이히만보다 훨씬 더 중할지도 모른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슈페어의 자기반성이 자기변호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까닭 역시 슈페어가 사유할 줄 모르는 한갓 관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반성과 자기변호의 줄타기는 슈페어에게 목숨을 부지할 기회를 주었고, 우리에겐 제3제국의 속살을 살펴볼 기회를 주었다. 이제 슈페어가 군수장관으로서 보낸 4년의 시간이 20년의 형기와 이 책 『기억』으로 상쇄될 수 있는지는 독자의 몫이리라.
# by | 2009/03/25 12:09 | 나온 책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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