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의 양식] 가운데 장-주네에 관하여

 
                                                          폴 오스터   

                                              장-주네

 

마티의 독자분께서 지난 주말에 저에게 놀라운 편지를 한 통 보내주셨습니다. 처음엔 그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 등장하는 장-주네에 관한 소감인가 했지요.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여기 들어오시는 독자 분들과 책 속에서 발견하는 즐거움을 함께 느껴보도록 하지요.

 

아래는  독자께서 보내주신 편지의 전문입니다. 편지를 보내주신 독자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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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감명 깊게 읽은 사람입니다. 특히 “장 주네에 대하여”를 매우 감동적으로 읽었는데, 다음과 같이 시작하지요.


내가 장 주네를 처음 본 것은 1970년 봄이었다. 미국 사회의 상상력이 뿜어내는 에너지와 패기가 사회 곳곳에 스며들기 시작하던 소란스럽고 어수선한 시대였다. 소리를 지르며 흥분할 일이 늘 있었고 부르짖어야 할 대의명분이 있었으며, 인도차이나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어 사람들이 애도하거나 항거했다. 미국이 캄보디아를 침공하기 두 주 전에 나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봄 축제가 한창이던 때에 장 주네를 보았다. 당시 대학은 1968년 소란의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학 당국은 불안해했고, 교수진은 심하게 양분된 상태였으며, 학생들의 교육은 교실 안팎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블랙 팬서를 지지하는 정오 집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컬럼비아 대학의 당당한 행정 건물인 로우 라이브러리의 계단이 집회 장소였고, 나는 무엇보다 장 주네가 연! 냅米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무척 참석하고 싶었다. 해밀턴 홀을 지나 집회 장소로 가는 도중에 내가 가르쳤던 학생 한 명을 만났는데, 캠퍼스 일에 특히 열성적이었던 그 친구는 주네가 정말로 연설을 하러 온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자신이 바로 동시통역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날 집회 광경은 두 가지 이유를 잊을 수 없다. 먼저 주네를 실제로 보게 되어 몹시 감동적이었다. 블랙 팬서 군중들과 학생들 가운데에 자리한 그는-계단 중앙에 선 그를 청중들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검은색 가죽 재킷과 푸른 셔츠에 단정치 못한 진 차림이었다. 그는 대단히 편안해 보였다. 자코메티가 그린 그의 초상화에서처럼 격렬함과 뛰어난 자제력과 거의 종교적인 차분함을 동시에 담은 모습이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사물을 꿰뚫어보는 주네의 푸른 눈이다. 그의 시선은 멀리까지 뻗어나가 불가해하면서도 놀랄 만큼 중립적인 표정으로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붙들 것만 같았다.

그날 인상적이었던 또 하나는, 주네의 팬서 지지 발언이 힘 있고 간결한 프랑스어였는데 나의 예전 학생은 이를 장식적인 만연체로 통역했다는 사실이다. 가령 주네가 “흑인들은 미국에서 가장 많은 탄압을 받는 계급입니다”하고 말하면, 통역가의 현란한 장식을 거쳐 이렇게 바뀌었다. “이런 망할 잡것 같은 한심한 나라에서 반동적인 자본주의가 모든 사람들을 엿 먹이는 한심한 상황을 보면, 단지 일부만이 아니라 어쩌고저쩌고.” 주네는 이런 지독한 장광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묵묵히 듣고 있었고, 연사가 아니라 통역가가 집회를 지배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연설을 마치고는 과장된 몸짓 없이 사라지는 그를 보자 그에 대한 존경과 흥미가 생겨났다. 『꽃의 노트르담』과『도둑 일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주네의 문학적! 위업에 대해 알고 있었던 나는 통역가가 덧붙인 과격한 괴짜 이미지와는 영 딴판으로 무척 수수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멀리서 보고는 놀랐다. 통역가는 주네가 희곡과 산문에서 묘사한 매음굴과 감옥에서의 외설적인 행동을 염두에 둔 나머지 그가 그날 집회에서 말한 내용은 무시했던 모양이다.

 

에드워 사이드 지음, 장호연 옮김, “장 주네에 대하여”,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마티, 2008

 

그런데 통역을 맡은 학생이 누군지 아시나요? 바로 폴 오스터입니다. 폴 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한번은 친구에게 덜미를 잡혀, 콜럼비아 대학을 방문한 프랑스 작가 장 주네와 야외 연단에 나란히 서서 <흑표범당>을 옹호하는 그의 연설을 통역한 적도 있다(무보수로). 주네는 귀 뒤에 빨간 꽃을 꽂은 채 돌아다녔고, 캠퍼스에 있는 동안 줄곧 입가에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빵굽는 타자기』, 열린책들, 2000


오스터가 1947년생이라고 하니 짐작해보면 이때는 오스터가 한창 혈기 왕성하고 방자할 나이입니다. 충분히 “장식적인 만연체”를 구사하며 통역할 수 있는 거지요.ㅋㅋ

마티 관계자 분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혼자 흥분해서 괜스레 호들갑을 떤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놀랍고도 매우 행복한(?) 발견이었기에 이렇게 글을 써봅니다.


주네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에드워 사이드 지음, 장호연 옮김, “장 주네에 대하여”,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마티, 2008


사이드가 얼마나 주네를 높게 평가하고 좋아하는지를 이 한 문장만으로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또 다음의 구절은 사이드가 주네를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주네)가 알제리와 팔레스타인을 선택한 것은 이국취미가 아니라 위험하고 전복적인 정치적 동기 때문이었다. 협상해야 할 경계, 충족해야 할 기대, 처리해야 할 위험요소 때문에 그곳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내가 팔레스타인인으로서 말하는데,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주네가 팔레스타인을 선택한 것은 가장 위험한 정치적 선택이자 두려운 여행이었다. 서방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자유주의로도 주류 정치 문화로도 흡수되지 못한 이들은 팔레스타인인이 유일하다. 팔레스타인인 아무나 잡고 물어보라. 어떻게 우리의 정체성이 여전히 범죄자, 비행자의 이미지로 굳어졌는지 말해줄 것이다. 대부분의 다른 종족과 민족에게는 권한을 부여하고 해방시켜주고 다양하게 위엄을 부여해준 서방이지만 우리를 표현하는 말은 여전히 테러리즘이다. 따라서 주네가 1950년대에 알제! 리를 선택하고, 이어 팔레스타인을 선택한 것은 그의 연대감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필수적인 행위이자 계속적으로 투쟁 중인 다른 정체성과의 동일시를 통해 황홀경을 느끼려는 그의 의지이며, 또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에드워 사이드 지음, 장호연 옮김, “장 주네에 대하여”,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마티, 2008


사이드의 글을 읽어보면 가히 그가 일급 비평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네를 정체성과 그의 욕망('황홀경')으로 해석하는 안목을 보십시오. 사이드는 주네의 작품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좀 과하다 싶을 만큼 상찬하고 있습니다.


나는 극히 소수의 몇몇 예외를 제하면, 20세기에 식민지 상황에서 나온 위대한 예술은 주네가 『병풍』에서 원주민들의 형이상학적인 반란이라고 부른 것을 항상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알제리의 상황은 『병풍』을 비롯하여 폰테코르보(Gillo Pontecorvo)의 「알제리 투쟁」, 파농의 책들, 카텝 야신(Kateb Yacine)의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이런 작품들과 비교하면 카뮈(Albert Camus)는 초라하다. 그의 소설과 에세이, 이야기들은 겁을 집어먹은, 그래서 너그럽지 못한 마음의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팔레스타인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급진적이며 혁명적이고 까다롭고 통찰력 있는 작품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쓰거나 그들을 대변하는 작품들이지 - 하비비(Emile Habibi), 다르위시(Mahmoud Darwish), 자브라(Jabra Ibrahim Jabra), 카나파니(Ghass! an Kanafani), 투칸(Fadwa Tuqan), 카셈(Sanih al-Kassem), 주네 - 그들을 주로 억압한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나오지 않았다. 주네의 작품은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의 표현을 빌리자면 희망의 근원들이다.

 

에드워 사이드 지음, 장호연 옮김, “장 주네에 대하여”,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마티, 2008



자코메티가 그린 장-주네                               

 

저는 개인적으로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외에 주네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위 구절을 통해 사이드가 주네의 작품을 읽으며 흘렸을 감동의 눈물은 볼 수 있었습니다. 또 주네의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단박에 주네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과 역사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흐름에 휘말린 듯하다. 언제나 조야(粗野)한 목적을 위해 눈에 드러나는 모습만을 바꾸려는, 걷잡을 수 없이 나날이 증폭되기만 하는 이러한 흐름에 사로잡힌 세상과 역사를 보고 있으면, 누구든 공포까지는 아닐망정 슬픔 같은 걸 느낄 것이다. 눈앞의 세상은 지금 그대로일 것이며, 어떤 행위 하나로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지는 못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향수에 잠겨 다른 우주를 몽상하게 된다. 거기에서는 눈에 보이는 외양을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미친 듯이 달려들기보다, 아예 그 외양을 부숴 버리는 일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외양에 가해지는 모든 행위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 좀더 정확히 말해 인간 정신의 - 전혀 다른 모험이 가능했을지도 모를 우리 내부의 어떤 비밀스러운 장소를 찾아내기 위해 스스로를 벗어 던지는! 일에 몰두하게 될, 그런 우주를 몽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미 알고 있어 가늠할 수 있는 곳이 아닌 미지의 다른 세계로 모험하려는 문명에의 향수를 느끼는 것은, 이러한 비인간적인 조건, 즉 돌이킬 수 없는 모양으로 되어 버린 세상 탓일 것이다.

 

장 주네 지음, 윤정임 옮김,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열화당, 2007


지난주에 명동성당 옆에 있는 중앙시네마 인디스페이스에서 「아웃 오브 플레이스Out Of Place: Memories Of Edward Said」를 봤습니다. 거기에서 경계면에 선 자로서 사이드의 흔들리는 정체성과 눈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현 중동 사태 때문인지 사이드가 더욱 생각납니다. 주네와 사이드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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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서출판 마티 | 2009/03/26 11:32 | 책 뒷이야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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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leodoll at 2009/07/26 01:54
30페이지정도 남은 <도둑일기>를 미뤄두고,
<하얀이빨>로 넘어간 저를 탓하게 되네요.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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